농업유산의 의미와 소명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농업유사심의위원장)

2014. 04.27(일) 20:36

인생살이의 기본은 ‘먹고 사는’ 것. 잘 먹고 못 먹고는 둘째 치고, ‘먹는’ 것이 문제로다. 사람이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먹고 사는’ 문제다. ‘사는’ 문제는 ‘먹는’ 것을 전제로 한다. 먹어야 산다. 진화론의 표현으로는 “약육강식”이라고 했고, 생태계의 표현도 “먹이사슬”이라고 한다. 사람이 ‘먹는’ 수단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 “농업”이다. 농산은 ‘먹는’ 것의 기본이 되었고, 그것을 업으로 하는 모습들이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 인간의 역사다. 팔도유람도, 세계일주도, 우주개발도 “농업” 기반없이 불가능하다.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자연조건의 상황을 맞으면서, 농업도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속되는 한 농업은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싶다. 따비로부터 쟁기로 이어진 농업방식은 트랙터를 낳았고, 동물뼈를 갈아서 만든 낚시바늘은 복잡한 어구로 진화하였다. 그 과정은 모두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숙고를 바탕으로 형성된 지혜의 소산으로 땅을 일구고 식물을 길러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산업사회의 생산과정이 공장화하면서 농업이 삶의 후면부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하지만, 농업을 “1차산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명백하게 살아있다. 실로 ‘먹고 사는’ 문제의 기본은 농업이라는 점은 망각할 수 없다. 이제 조상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지혜에 대한 신념이 필요하다.

청산도의 ‘구들장논’은 쌀밥으로 메를 지어서 조상의 제사상에 올리려는 섬사람들의 염원과 정성이 담긴 지혜의 소산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한 천수답일지언정, 물과 돌과 흙과 볍씨의 상관관계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기반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였던 조상들의 지혜가 영글어진 것이 ‘구들장논’으로 현현되었다. 산비탈을 정리하고 넓적한 돌을 준비하여 손바닥만한 논이라도 마련하려는 의지와 노동의 결과는 벼농사를 삶의 근간으로 해왔던 조상들의 지혜가 전승된 유산이다. 화산으로 뒤덮힌 제주도의 돌로 이루어진 밭담은 돌밭을 일구어서 밭농사를 지음으로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였던 제주도민들의 오래된 삶의 모습이다. 돌밭의 돌들을 주어내고 식물의 뿌리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제주도민들의 억척같은 삶의 유산이다. 밭에서 주어낸 돌들이 세월을 이어서 쌓이고 쌓인 피땀어린 삶의 증언이다. 그렇다고 밭에 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돌을 모두 주어내지 않는다. 가뭄이 닥쳤을 때, “돌이 오줌을 싸기 때문에” 농작물들이 마지막 한계점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돌과 흙과 식물의 관계에 대한 정밀한 생태학적 이해가 없으면 진행될 수 없는 얘기다.

청산도 구들장논과 제주도 밭담은 “낡은” “원시적인” 구태의 흔적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으면서 대대로 쌓고 갈고 다듬어온 지혜의 소산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금 “농업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전승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에 동참하고 있다. “농업유산”은 과거이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어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농업유산”으로부터 미래의 삶을 위한 지혜를 배울 차례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한 지구상의 인류는 일대 위기를 맞고 있고, 기후변화의 위기 극복을 위하여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려는 시도가 이 세상 각처에서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하기 위해서다. 이 유산들은 인류가 지구상의 곳곳에서 전개해온 지혜의 소산들이고, 이 지혜의 소산들로부터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구들장논과 밭담은 “오래된 미래”의 샘플들이다. 이러한 유산들을 발굴하고 의미부여를 하고 계승하는 작업이 한 땀 한 땀 전개될 때, 탁상공론으로 인류의 삶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기우는 한 낱 기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봉 기자 env-news@hanmail.net        유봉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